누가 앤 불린와 결혼 했습니까?
Henry VIII of England 결혼 한 앤 불린 . Henry VIII of England 결혼식 날 41 세였다 (41 년 6개월 28일).
결혼 생활은 3년 3개월 23일(1208일)이었다. 결혼은 끝났다.
앤 불린
앤 불린(Anne Boleyn, 1501년/1507년 ~ 1536년 5월 19일)은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이다. 헨리 8세는 교황청이 전처인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이혼을 불허하자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잉글랜드 교회를 분리하는 수장령을 선포하고 앤 불린과 결혼을 강행하였다.:286-289 이 결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으며 헨리 8세는 또 다시 이혼을 결심하고 앤 불린을 불륜과 이단, 모반 등의 혐의로 처형하였다. 앤 불린을 둘러싼 이러한 상황은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생모이다.:4
앤 불린은 토머스 불린과 엘리자베스 하워드 부부의 딸로 어린 시절 네덜란드와 프랑스에서 자랐다. 1522년 사촌인 제임스 버틀러와 결혼하기 위해 귀국하였으나 이 혼사는 성사되지 않았고, 대신 헨리 8세의 왕비인 카탈리나의 시녀가 되었다. 이듬해인 1523년 헨리 퍼시와 혼담이 오갔으나 이 혼담도 이루어 지지 않았다.
1526년 2월에서 3월 무렵 헨리 8세는 앤 불린에게 자신의 정부가 되달라고 요구 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언니인 메리 불린이 헨리 8세의 정부였고 옆에서 그 사이를 지켜보았던 앤 불린은 이 요구를 완강히 거부하고 오직 정식 결혼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요구하였다. 헨리 8세는 딸 메리가 있었지만 왕위를 물려줄 아들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탈리나와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하기로 결심하였다.
당시 유럽 기독교 세계에서 결혼은 신성한 것으로 여져졌고 이혼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았지만, 왕족이나 귀족은 대개의 경우 정략 결혼으로 맺어진 사이였기 때문에 결혼을 무효화 하는 방식으로 이혼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헨리 8세 역시 카탈리나가 요절한 형 아서 튜더와 이미 결혼하였기 때문에 자신과의 결혼은 무효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교황청은 헨리 8세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헨리 8세는 잉글랜드 교회의 분립을 선언하게 된다.
수 많은 갈등 속에서 이루어진 결혼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앤 불린은 엘리자베스를 낳았지만 이후 유산을 반복하였고, 앤 불린이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한 헨리 8세는 아들을 낳아 줄 또 다른 여성에게 눈을 돌렸다. 1536년 4월 앤 불린은 불륜과 이단, 모반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런던탑에 수감되었다가 5월 19일 참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그로부터 11일 후에 헨리 8세는 앤 불린의 시녀 출신이었던 제인 시모어와 결혼하여 또 다시 시녀에서 왕비로 신분이 바뀌는 일이 일어났지만, 헨리 8세의 결혼과 이혼 편력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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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VIII of England
헨리 8세(Henry VIII, 1491년 6월 28일 ~ 1547년 1월 28일)는 헨리 7세 뒤를 이은 잉글랜드 국왕이다. 튜더가로서는 두 번째 국왕이었다. 헨리 8세는 여섯 번에 이르는 결혼과 이 과정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불화 끝에 수장령을 통해 잉글랜드 교회를 분리 독립 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헨리 8세는 교황 수위권에 대항하기 위해 왕권신수설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전제군주로서 행동하였다. 종종 반대자에게 정치적 반역 혐의와 함께 이단 혐의를 씌웠고, 사권박탈법으로 피의자의 법적 지위를 박탈하여 정식 재판 없이 처형하였다. 헨리 8세는 토머스 울지, 토머스 모어, 토머스 크롬웰, 토머스 크랜머 등 두드러진 인물을 총리로 두어 통치하였으나 자신의 뜻과 맞지 않을 때는 추방하거나 처형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로마 교황청으로 가던 교회의 수입 상당수가 왕실로 향하게 됨으로서 헨리 8세는 유래없는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으나, 사치스러운 생활과 비효율적 국정 운영, 막대한 비용을 들인 전쟁 등으로 재정 사정은 좋지 못하였고 종종 파산 위기를 겪었다.
1535년과 1542년 웨일스 법을 통해 웨일스를 잉글랜드의 하위 구역으로 완전히 통합하였고, 1542년 아일랜드 군주법을 통해 아일랜드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이후 20세기에 들어 아일랜드가 독립할 때까지 잉글랜드의 국왕은 자동적으로 아일랜드의 국왕을 겸임하였다.
당대 사람들은 헨리 8세를 매력적이나 야욕이 강한 카리스마 넘치는 통치자로 여겼다. 그는 스스로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들며 다재 다능한 면모를 과시하였고 각종 스포츠와 게임, 도박 등 활동에도 열정을 보였다. 젊어서는 탄탄한 몸매를 지녔으나 점차 체중이 늘어 중년이 되자 심각한 과체중과 함께 여러 질병을 앓았다. 말년의 헨리 8세는 종종 음탕하고 이기적이며 편집증적인 폭군으로 묘사된다. 헨리 8세 사망 이후 당시 아홉살이었던 에드워드 6세가 후계를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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